나는 연아의 은메달이 다행스럽다

.

먼저 말해두자면 나는 피겨팬이나 연아팬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김연아’라는 호사를 100% 즐길 안목이 내게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 이후 목표를 잃은 혼란과 큰 부담 속에서도 다시 한 번 날아올라 깨끗하게 마무리를 짓는 과정을 보면서 어쩌면 경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밴쿠버를 통해 연아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부와 명예를 얻었다. 그녀는 그저 좋아하는 스케이트를 더 잘 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것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녀의 등에 자신들의 바람을 짊어지웠고 연아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자유, 휴식, 건강, 사생활… 많은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것들이 그녀에겐 그렇지 않았다.

.

어떤 면에서는, 연아에게 지난 4년은 일종의 빚을 갚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부와 명예… 자신이 원했다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억지로 지워진 빚이었지만, 다시 한 번 그 감동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달라는 채권자들의 요구를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아픈 몸, 복귀에 대한 두려움, 목표를 잃은 혼란스러움, 전 국민의 부담스러운 기대를 그대로 짊어진 채 묵묵하게 빚을 갚아 나갔다. 평창 올림픽의 유치에 큰 역할을 했고, 후배들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으며, 소치에서는 긴 공백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적어도 내눈에는) 훌륭한 경기를 보여주었다.

그녀에게 밴쿠버의 의미는 금메달에 있었지만, 소치의 의미는 처음부터 금메달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소치는 피겨 인생의 마무리이자, 동시에 피겨로 인한 모든 부담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의미가 더 컸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금메달을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빚을 모두 갚았다는 홀가분함과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자유에 대한 기대가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

피겨 선수로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제 새롭게 자신의 인생을 걸어가는 연아를 보면서, 문득 나중에 딸이 내 품을 떠나는 순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아빠,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하지만 저는 딸로서 도리를 다했고, 이제 아빠를 떠나 제 인생을 살겠습니다”

.

“제게 금메달은 중요하지 않았어요”라는 연아의 한마디는 그 금메달에 목매던 우리에게 멋진 펀치를 날린다.

조금은 섭섭하지만, 그보다 더 큰 대견함과 뿌듯함을 담아 연아의 미래에 박수를 보낸다. 

.

.

아차! 그러고 보니 연아가 이번에 금메달이라도 땄으면 어쩔 뻔했는가? 우리는 또 세계의 영웅이니,  3연패(설마!) 운운하며 채권자 노릇을 하려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녀의 미래를 위해선 은메달이 가장 좋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연아의 은메달이 다행스럽다. 진심으로…

Adios

Advertis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