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답 없는 일 하는구나?

너도 참 답 없는 일 하느라 고생이 많다
야…그거 정말 답 없는 일인데?
우리가 하는 일이 다 답없는 일이지 뭐

 

회사에서 종종 듣는 얘기다.

8년이 조금 넘는 직장생활을 통해 내가 주로 해왔고 흥미있어 하는 일이 신사업, 기획, 전략, 리서치, 기업문화 뭐 이런 것들인데, 뭐 꼭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심심치 않게 주고받는 말인 것 같다.

문제는 이런 표현이 쓰이는 맥락이 상당히 자조적이라는 점이다. 남을 두고 얘기할 때는 상당한 안쓰러움과 동정의 의미가 섞여있고, 자신을 두고 얘기할 때에는 거의 신세한탄에 가깝다. 여러 명이 같은 처지에서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면, 뭔가 집단 멘붕 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그 행간의 의미를 좀 풀어쓰자면 이렇다.

그렇게 광범위하고 뚜렷한 방향성에 대한 가이드도 없는 과제를 하느라 엄청 고생하면서도 당장 생색낼 수 있는 성과나 아웃풋도 마땅치 않으며, 모든 이의 공감대를 얻기도 힘들어서 어떤 결론을 내도 누군가에게는 안 좋은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일을 하고 있구나

 

솔직히 난 이런 식의 표현을 싫어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의 가치를 폄하하고,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얘기하는 ‘답 없는 일’이란 도대체 뭘까?

일단 반대 개념인 ‘답 있는 일’이 뭔지 한 번 생각해보자. 수학처럼 일정한 규칙이 있어서 그에 따라 정답/오답이 비교적 명확히 판별되는 일. 영업 실적처럼 성과를 수치화하기가 용이해서 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분이 쉬운 일. 매뉴얼 또는 상사의 지시 내용이 명확해서 그대로 잘 수행하면 되는 일. 뭐 그런 일이 아닌가 싶다. 물론,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답 없는 일’이란 대충 그 반대라고 보면 된다. 저마다 나름의 중요성을 가진 가치들 사이에서 상황에 맞게 우선순위나 균형점을 찾는 일. 일의 성과를 수치화하기 어려워서 어떤 이는 잘했다고 하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일.  문제제기 정도의 지시 밖에 없어서, 스스로 조사하고 판단하여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상사를 설득해야 하는 일.

일반적으로 ‘답 없는 일’은 정신적으로 좀 힘든 면이 있다. (답 있는 일이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단 ‘내가 왜 이 일을 해야하는가’에 대해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며, 여러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듣다보면 혼란스럽기도 하고, 참고할 만한 선례도 별로 없어 여러가지로 방법을 찾느라 생각이 복잡해진다. 또, 아무리 욕 먹을 각오를 하더라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머리에서 김이 나네…횽아도 답없는 일 하는거야? (중앙일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답 없는 일’이 매우 가치가 있으며,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답 있는 일이 그렇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경영환경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과거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가치판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조직의 방향과 운영방식을 새롭게 설정할 필요성이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고 생각한다.

골치는 좀 아프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얻을 수 있는 것도 많다. 여기저기 자료와 정보를 모으는 것은 물론, 이것을 엮어 정교한 논리 체계를 만드는 능력을 키울 수 있으며, 욕을 덜 먹으려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설득하는 능력이 개발될 수 밖에 없다. 또, 이런 종류의 일은 그 영향력이 꽤 광범위한 경우가 많아서 일이 잘 되었을 경우 그만큼 보람도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일을 하는 이유를 누군가의 지시 혹은 이미 정해진 게임의 룰에서 찾는 것과 자기 스스로의 내적 동기에서 찾는 것은 결과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또한, 일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도 내적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

 

스스로 자기 일의 가치를 낮게 보면, 남들이 그 가치를 높게 봐 줄 리가 없다.
나와 우리 팀, 그리고 세상에 ‘답 없는 일’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부록) 오늘 페이스북에서 본 프랑스 학생들의 ‘답 없는’ 시험문제(발췌)

Q. 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Q. 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Q. 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Q. 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Q.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Q.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Q. 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Q.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Q.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Q. 이론의 가치는 실제적 효용가치에 따라 가늠되는가?

Q.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Q. 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Q.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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